“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로마는 교만한 도시였으며 복음은 로마가 점령한 작은 나라의 수도인 예루살렘으로부터 온 것이었다. 그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은 사회의 엘리트들이 아니었다. 이들은 보통 사람들이었으며 노예들도 있었다. 그러나 로마 사람들은 많은 위대한 철학자들과 철학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기에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살아났다고 하는 유대인의 관한 이야기를 우화로 생각하고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고전1:18 “십자가의 도가…”
그리스도인들은 서로를 형제와 자매들로,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 하나로 대하였는데 이것은 로마의 자만심과 위엄과는 맞지가 않았다. 그래서 로마에 가서 이러한 메시지를 전하려는 한 유대인에게는 웃음거리만 되었다. 그래서 바울은 이러한 담대한 고백을 한 것이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그는 로마서1장에서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1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2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3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4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로마 황제로부터 온 메시지라면 곧바로 로마인들의 관심을 끌었을 것이다. 그러나 복음의 메시지는 하나님의 유일한 아들에게서 왔으며 그 아들에 관한 메시지다. 바울은 이 메시지를 “하나님의 복음”(1)이라고 불렀다.
- 복음이란 무엇인가?
복음은 헬라어로 “유앙겔리온”이다.
1) 결혼, 탄생을 전하는 좋은 소식에 사용되었다.
2) 이스라엘 자손들이 바벨론 포로생활을 끝내고 예루살렘으로 귀환하는 해방의 기쁜 소식을 전할 때 사용되었다.
3) 전쟁의 승리 소식을 전할 때 사용되었다.
4) 로마의 새 황제가 등극할 때 경축 특별사면을 하는데 이 때 외치는 말이 “유앙겔리온”이다. 죄수들과 재판을 받기 위해 기다리던 자들에게 최고 기쁜 소식이 유앙겔리온이다. 다만, 죄수들 중에서 반역자들과 황제 등극을 인정하지 않는 자들은 사면에서 제외되었다.
* 당시의 로마 시민권
바울이 로마서를 쓸 당시의 로마시민권은 모든 것이 첫 번째였다. 로마시민권자만 되면 모든 신분보장은 물론 어떤 죄를 짓더라도 황제에게 재판을 받겠다고 하면 그 누구도 그를 재판 자리에 세울 수 없었다. 황제 외에는 그를 재판할 수 없었다. 그러다보니 재판이 많이 밀려 몇 년 후에 재판을 받을 때도 있었다. 그리고 재판을 기다리던 중에 황제가 죽으면 모두 특별 사면령을 내리는데 이 때 외치는 선포가 “유앙겔리온”이다.
바울도 사도행전 25:21, 25 “21 바울은 황제의 판결을 받도록 자기를 지켜 주기를 호소하므로 내가 그를 가이사에게 보내기까지 지켜 두라 명하였노라 하니… 25 나는 살피건대 죽일 죄를 범한 일이 없더이다 그러나 저가 황제에게 호소한 고로 보내기를 작정하였나이다”
그래서 황제에게 간다.
* 예수 그리스도가 복음이다.
복음의 본질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인해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가지는 것이다. 복음의 출처는 하나님이시다.
복음을 통해 인간은 하나님과 교제가 회복된다. 복음을 통해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된다. 복음의 능력을 가진 자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예) 12제자들의 순교
베드로: 로마에서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었다.
야고보: 예루살렘에서 목베임을 당하였다.
요한: 도미티안 황제의 박해 때 가마솥에 던져 졌다가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진 후 밧모섬에 유배되어 있다가 (거기서 요한계시록 기록) 에베소에서 죽었다.
안드레: 그리스의 파트레에스 오늘까지도 안드레 십자가라고 불리우는 자형십자가에 달려 죽었다.
빌립: 소아시아에서 돌에 맞아 죽었다.
바돌로매: 아르메니아에서 산체로 살껍질을 벗기우고 목베어 죽임을 당하였다.
마태 : 에티오피아에서 칼에 찔려 살해 당하였다.
도마: 인도에서 창에 몸을 찔려 관통하여 죽었다.
(예화) 영국의 물리학자, 수학자 “화이트 헤드”
할머니 – 넘어진 것을 도와줌. “당신 예수 믿습니까?” 깜짝 놀란 교수 – “나 예수 안 믿습니다.” 아직도 예수 안 믿고 뭘하느랴고 호통을 치면서 이번 주일에 자기 교회로 오라고 한다. 고민하다가 주일에 교회에 온다. 그 교회 담임 목사가 영국에서 최고의 석학이 오니까 그 날 준비한 설교보다 훨씬 더 지적으로 설교를 했다. 다음 주에는 물리학 책을 참고해가며 설교를 준비했다. 교수 – “목사님, 목사님 설교에는 내가 만난 저 할머니 속에 계시는 예수님이 없습니다.” “나에게 예수님의 복음을 들려주세요.”
* 노아의 방주는 그 당시 최고의 복음이었다.
노아의 방주가 닫히기 전에 왜 아무도 방주로 오지 않고 노아의 식구들만 왔는가? 방주에 들어오려면 몸만 와야 하기 때문이었다.
방주에는 노나 키가 없었다. 방주의 모양은 거의 사각형이었다. 빨리 갈 필요가 없었고, 어디로 갈 필요도 없었다. 떠 있기만 하면 된다.
절대로 뒤집히지 않고 안전한 배였다.
그것은 하나님이 운행하시고 보호하시고 먹이시고 살리신다는 증거였다.
- 복음의 능력은 무엇인가(16).
1) 믿는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신다.
복음은 세상을 변화시킨다.
바울은 죄수의 몸으로 로마에 들어갔다. 황제에게 재판을 받겠다고 했기 때문에 황제에게 보내졌다.
당시 로마는 유럽, 아프리카, 소아시아, 팔레스타인, 지중해를 중심으로한 전 지역을 정복한 거대한 나라였다. 그런데 바울이 로마 심장부로 들어가면서 오직 복음 하나 가슴에 품고 들어가서 그 복음으로 온 로마를 정복해 버렸다.
2) 복음은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능력이다(16).
당시 힘, 능력은 로마가 가장 자랑하던 것이다. 한 나라를 정복하고는 다른 나라를 정복하기 위해 길을 잘 닦아놓았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 헬라에게 철학이 있었다면, 로마에게는 힘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로마는 여전히 연약한 나라였다. 철학자 세네카는 로마시를 “악의 소굴”이라고 불렀다. 작가인 유베날은 로마시를 가리켜, “제국의 너저분한 것들이 넘쳐 흐르는 불결한 하수도”라고 불렀다.
그래서 바울이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은 하나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는 죄악으로 가득한 로마를 향해 인간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진 유일한 메시지를 가지고 가고 있었다. 그는 이미 고린도와 에베소 같은 사악한 도시들에서 복음이 전파된 것을 보았기에 로마에서도 복음이 잘 전파되리라고 확신하였다.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능력인 복음은 자신을 변화시켰고 세상 사람들을 변화시켰기 때문이다.
“복음은 구원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다”에서 “구원”이란 단어는 바울의 시대에 있어서는 대단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그 기본적인 의미는 “공식적인 구출”이며, 개인이나 국가를 어려움에서 건져내는데 적용되는 말이었다. 이럴 때 황제는 하나의 구세주로 여김을 받았으며, 사람을 병에서 치료해 준 의사도 역시 구세주였다.
복음은 죄인들을 죄의 형벌과 세력으로부터 구출한다. 구원은 이 로마서의 핵심적인 주제이며 모든 인류가 굉장히 필요로 하는 것이다. 이 “구원의 능력”은 잃어버린 한 영혼을 구원시키는 하나님의 고유하시고 전능하신 능력이다. 그러므로 누구나 구원받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와 주님으로 믿어야만 한다.
3) 복음은 하나님의 의를 나타낸다(17).
바울의 로마서가 마틴 루터와 웨슬레를 변화시킨 것처럼 지금도 여전히 사람들의 생애를 변화시키고 있다. 마틴 루터가 형식적인 종교에서 벗어나 믿음을 통하여 은혜로 말미암은 구원의 기쁨으로 들어가도록 인도했던 구절이 바로 로마서 1:17이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로마서 1:17은 로마서의 핵심 구절이다. 바울은 이 구절에서 주제를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의”다. 의라는 단어는 본서에게 이런 저런 형식으로 60번 이상 사용되고 있다. 하나님의 의는 복음에 가장 잘 나타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하여 죄를 심판하심으로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셨고, 또한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하여 믿는 죄인들이 구원을 받을 수 있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셨기 때문이다.
1) 죄를 지으면 하나님의 저주를 받게 된다.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여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임하고 네게 미칠 것이니”(신28:15).
2) 율법으로 의로워 질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율법을 모세를 통하여 전 인류를 대표하여 주셨다. 율법을 받은 이스라엘 사람뿐만 아니라 이 세상 모든 사람들 중에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다 지키는 사람이 없다. 그러므로 율법으로서는 의로워 질수가 없다. 성경은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라”(롬3:20) 고하셨다. 의로워 지는 방법은 오직 한 가지 복음을 받아들이고 믿는 것뿐이다. 율법을 주신 이유는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함이다.
3)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 났습니다.(롬3장21-22)
복음을 믿음으로 의로워 지는 이유는 복음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 났기 때문이다. 그것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다. 사람의 선행으로 의로워질 육체가 없으므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값없이 주시는 의다. 의로워 진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죄인에게 진노하시는 진노를 거두시고 화목이 이루어지고 하나님과 교제가 이루어지며 하평을 누리게 되는 것을 말한다.
“어떻게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죄인을 용서하시고도 여전히 거룩하실 수가 있으신가?”라는 질문은 복음에서 해답이 주어진다.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하여 하나님은 “의로우시며 의롭게 하시는 자”로 나타나고 있다. 롬3:26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복음은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를 나타낸다. 구약에서 의는 행위로 말미암은 것이었으나, 죄인들은 곧 하나님의 복음에 순종할 수 없으며 하나님의 의가 요구하는 바를 충족시킬 수 없음을 발견하였다.
여기서 바울은 하박국 2:4을 제시한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 구절은 신약에서 세 번 인용되고 있다(롬1:17, 갈3:11, 히10:38). 로마서는 “의인”을 설명하고, 갈라디아서는 “살리라”를 히브리서는 “믿음으로”를 설명한다. 로마서에는 신앙 또는 불신앙을 가르키는 곳이 60번 이상 되는데, 그것은 죄인이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 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길 뿐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죄는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짊어지셨기 때문에 모두 사라졌고, 적극적인 의, 다시 말해 예수님이 은혜로 죄인에게 주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복음이 죄인에게 주는 의는 하나님 자신의 의이며 이 안에서 죄인은 영원히 하나님과 바른 관계 속에 있게 된다.